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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o

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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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흥민씨는 원래 본(本)이 하나인데...오랜 세월을 거쳐오면서 사는 곳이 서로 달라지거나, 선조님들 중에 특출한 벼슬(또는 공을 세운)을 한 분이 있으면 기 분을 깃점으로 파를 형성하게 되지요. 본은 하나인데, 파는 그 중에서 포기가 갈라져나온 문중을 이르는 말이라고나 할까요.


여흥 민씨의 시조


여흥 민씨의 시조는 민칭도(閔稱道)이며, 고려 중엽초에 중국에서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귀화하였으며 관직은 고려 상의봉어(高麗尙衣奉御)이다.


閔씨의 본관


민씨의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지금의 경기도 여주의 옛 지명이다.

민씨의 본관을 여흥 황려(黃驪), 여주, 영주, 대전등 여러 본관을 쓴 예가 있었으나 여흥황려는 여주의 옛 지명이며 그 외는 거주 지명이다.  

따라서 閔씨는 모두 시조 민칭도 할아버지의 자손이며 현재는 모두 여흥을 본관으로 한다.


여주의 지명 변천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골내근형 (骨內斤縣)

고구려

황효현   (黃驍縣)

신라 경덕왕

황려현   (黃驪縣 또는 黃利)

고려 초기    

영의      (永義)

고려 고종    

여흥군   (驪興郡)  

고려 출열왕  

여흥부   (驪興府)  

조선 태종    

여주목   (驪州牧)

조선 예종  

여주군   (驪州郡)  

1914년  



여흥민씨(驪興閔氏)

 □ 유래

민씨는 본래 공자의 10제자중의 한명인 자건의 후손이 우리나라에 왔다가 여흥(경기도 여주)에 정착하여 살았다고 한다. 시조 민칭도(閔稱道)는 고려때 벼슬을 했으며 고려 충숙왕(27대)때에 수정승을 지낸 학자인 민지를 시조로 하는 '문인공파'와 같은 시기에 대제학을 지낸 민적을 시조로하는 '문순공파'로 나뉘어 진다.

여흥민씨의 씨족연원은 두가지 설이 전한다.

그 하나는 고려 중엽 중국에서 우리 나라로 온 사신이 정착했다는 설과 경기도 여주 향리에  있는 영월루 민굴(閔窟)(일명 마암굴)에서 나왔다는 두 가지 설이다.

그러나 여흥민씨측은 첫번째 설을 주로 믿는 편이다.

민씨들이 믿고 있는 시족 연원은 다음과 같다.

민씨는 본래 공자의 제자 가운데 10 철중(哲中) 한 사람인 자건(子騫)의 후예로서 그 후손인 칭도(稱道)가 고려 때 사신으로 우리 나라에 왔다가 경기도 여흥(여주의 옛 이름)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고려의 상의봉어(尙醫奉御, 예복 관리의 벼슬)에 올랐던 칭도를 여흥민씨의 시조로 보고 있다.

시조 민칭도의 선계는 어느 때부터 드러났고 또 민칭도가 몇대 손인지도,언제부터 여흥을 본관으로 삼았는지도 여러 보 서문에는 밝혀지지 않으나 세록편을 보면 세 민지가 고려 원종조에 문과에 올라 추성수정성보리공신이 되고 여흥부원군에 봉해졌다고 하였다. 따라서 뚜렷하게 관향을 여흥으로 삼은 것은 이때부터가 아닌가 싶다.

이러한 연원을 가진 민씨가 해남에 정착한 시기는 조선 초이다.

계유정란이 일어났던 당시 이조판서를 지냈던 민신(伸)은 절제 김종서와 함께 단종 계유정란에 연류돼 다섯 아들인 보창, 보해, 보석, 보흥, 석이와 함께 참형을 당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민신의 손자인 중건(仲騫)만이 용케 살아 남아 해남으로 오게 된다.

즉 당시 집안의 종이었던 사람이 7살 먹은 중건을 항아리에 넣어 지게에 짊어지고 중건의 외숙인 김종 진도군수에게 내려왔다는 것이다.

옛 진도 땅이었던 삼산면(당시 삼촌면)에서 자랐다는 중건은 성장하여 초계 정씨와 결혼, 해남읍 해리로 분가해 온다. 그리고 그의 후손대에 이르러 마산면 양지리(화내리)로 옮겨간다.

이러한 내력으로 인해 해남지역에서 거주하는 민씨들은 입향조인 중건의 조부 민신을 중시조(中始祖)로 삼고 있으며 여흥민씨 족보상 서열인 45개파 중 42번째 파인 충정공파에 속하고 있다.

현재 충정공 민신의 후손은 해남 전역에 7백호가 살고 있고 타지로 나간 사람까지 합하면 2천여호가 족히 넘는다.

또 민신의 후손은 21대(희자 돌림)까지 이어지고 있고 주요 거주지는 마산면 중앙을 위시로 마산 전역에 걸쳐 산다. 또 해남읍 해리, 남송, 계곡면 상면, 산이면 송천, 황산면 연호, 원호 등에도 많다.

한편 민신은 정조왕대에 이르러 그의 후손인 치상이 올린 상소문 등으로 충정공이라는 시호를 받게 되고 영의정으로 추증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민신은 그의 아들 보창, 보해, 보석과 함께 미산서원에 배향되었고 아들 셋과 함께 서림공원 사층문에도 모셔져 있다.

그의 제사는 음력 10월 10일 마산면 남계리에서 부조묘 제사로 지내고 있다.

 여흥민씨는 고려 때에는 명문 중 명문 집안으로 일컬어졌고 조선시대에도 4명의 왕후를 배출할 만큼 세도가 있는 집안이었다. 태종비인 원경왕후를 비롯하여 숙종비인 인현왕후, 고종비  명성왕후, 순종비인 순명왕후 등 4명의 왕후를 배출시킨 데다 세종 때에는 일등청백리로 잘 알려진 불해, 불탐도 여흥민씨 집안에서 나온 사람들이고 이 외에도 정승, 판서 등 고관대작도 즐비하게 배출시킨 명문집안 이었다. 명문 집안이었던 만큼 해남에서도 여흥민씨의 세도는 꽤 컸다. 특히 정조 때에 이르러 계유정란의 희생자였던 민신에게 충정공 시호가 내려지고 영의정으로 추증되면서 여흥민씨의 세도도 이지역에서 더욱 높아졌다.

때문에 매일 아침 아침재를 넘어 아침 문안 인사를 해야 하는 등 해남으로 내려온 현감들이 시달렸던 얘기며 지역 세도를 꺾기 위해 우슬재와 아침재를 석자 세치씩 깎아 내렸다는 얘기 등 지역 토착 세력 중 하나이기도 했던 여흥민씨의 세도를 짐작케 하는 얘기들은 많이 전한다.  

또한 지금까지도 마산 지역에서는 원주이씨, 무안박씨와 함께 여흥민씨는 중심적인 성씨로 자리잡고 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세 성씨의 텃새가 마산 지역에서 심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여흥민씨와 얽힌 재미있는 설화도 전한다.

산이면 상공리에 백로와 새우형국을 한 바위가 서 있었는데 그 바위 바로 위쪽에 여흥민씨 선산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그런데 김서구가 해남 군수로 재직시(1782년 2월-1783년 6월) 여흥민씨의 세도가 높아 일하는데 불편함을 느껴 백로새우 바위를 파괴시켜 버렸다고 한다. 그러자 그렇게 위세가 당당하던 여흥민씨 백자돌림들이 한해에 여럿이 죽은 일이 발생했다는 얘기다.

또 명문거족답게 여흥민씨와 관련된 초당이 많이 존재했음을 사료 등에 나타나고 있다.

귤주공 시가 쓰여 있었다는 남곽초당(해남읍 용정리), 해리에 있었다는 삼해정, 동백정, 금강골 부근에 터만 남아 있는 금강초당 등이다.

또 민씨 집안에서는 아직까지도 집안에 사당을 모셔 놓고 고조부까지를 모시고 있는 집도 있다.

해남읍 백아리에 거주하는 민정기씨 댁과 해남읍 해리 민두삼씨 댁이 그 장본인.

한편 여흥민씨 충정공 하는 학자들을 두루 배출한 집안으로 유명하다.

민선식씨와 남식, 지식 3형제가 모두 이학박사이고, 그의 조카 다섯 모두 박사학위를 수여할 정도. 또 서울대 사학과 교수인 민두기, 민영규(연대교수 역임), 민방기(전대법대 학장역임)씨 등 이 외에도 여흥민씨 충정공파는 많은 학자들을 배출시켰다.    -해남 신문에서-

<본관> 여흥(여주)

여흥은 여주의 옛이름이다. 여주는 본래 고구려의 골내 근현인데, 신라 경덕왕이 황효현으로 고쳐 기천군의 영현으로 만들었고,고려초에는 황효현으로 개칭,원주에 속하게 하였다. 충렬왕31년 순경왕후 김씨의 내향이라 하여 여흥군으로 승격하였고,조선조 태종이 원경왕후의 친향이라하여 부로 승격,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관하였다. 그 후 도호부가 되었고 세종대왕이 영릉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여주로 개칭되었다. 

주요 성씨로는 민.이.안.윤.김.한.음씨 등이 있었다.

<인물>

민공규 : 고려 명종때 좌간의 대부, 문하시중 평장사

민지 : 충렬왕 때 집현전 대학사

민종유 : 부흥군

민적 : 보문각 제학, 대사헌, 진현관 대제학

민제 : 예의관서, 예문관 제학, 예조판서, 한양부윤, 대사헌, 정하 우정승

민개 : 한성부윤, 대사헌

민여익 : 개국공신 3등, 도승지, 대사헌, 호조판서

민의생 : 조선 예조판서

민수생 : 조선 이조판서

민신 : 문종때 이조판서

민효증 : 정국공신, 좌찬성

민재인 : 중종때 좌찬성

민몽용 : 경기도 관찰사, 좌참찬, 이조판서, 우의정

민기 : 경상도 암행어사, 대사성, 대시간, 대사헌, 대사성, 우의정

민형남 : 형난공신, 우찬성

민여임 : 남원부사, 공조참판

민인백 : 선조때 충주목사, 안변부사, 한성부 좌윤

민성휘 : 인조때 개성부유수, 전라도 관찰사, 평안도 관찰사, 호조판서, 형조판서

민영환 : 대사성, 예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서, 대한민국 건국공노 훈장 중장 수여

민종식 : 홍주에서 의병활동,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노 훈장 복장 수여

<개요>

여흥 민씨는 역사상 세 차례 크게 두각을 나타냈다.첫번째가 고려말 에서 조선개국까지,두번째가 조선의 숙종-영조대,세번째가 한말,특히 일.로.청 등 열강세력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격돌하던 한말의 역사적 시련기에 풍운이 왕비 민비를 정점으로 20여 년간 정권을 장악,갖가지 공과를 남겼다. 시조는 민청도다. 공자의 10명 제자중 한 사람인 민자건의 후예로 고려 중엽 사신으로 왔다가 귀화,여흥에 정착했다고 한다. 단일본으로 인구는 약 14 만명으로 그 역사적 위세에 비해 인구는 적은 편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던 1392년 조의생.임선미.민안부 등 72 명의 고려충신들은 이성계에게 반기를 들고 두문동에 은신했다. (두문동의 대학살)에서 극적인 탈출을 감행,경남 산청군 생초면 대포리에 피신했다는 것이다. 그의 후손들이 마을을 이루어 대대로 살아오는데 지난 81년 발견 "농헌실기"에 그의 (천리길 탈출기)가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마을 전체 50여 가구 2백50여명이 모두 그의 후손들이다. 인근 산청.거창.함양 등지에 4천여 가구가 산재해 있다. 현재 인구는 약 137,314명으로 조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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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南군 馬山면 禾內리

해남읍의 지형을 사람들은 옥녀탄금형(玉女彈琴刑)이라고 말한다.

삼산면과 현산면 경계에 병풍산이(313m)있다.

이 산과 해남읍 중간이며 읍과 삼산면 면계를 이룬 곳에 금산(216m)이 있으며 해남읍 뒷산 금강산(481m)에 미암(眉岩)이 있다. 이같은 지명은 읍기지명풍수(邑基地名風水)에 의한 것으로 금강산이 옥녀고, 미암은 그 옥녀의 눈썹이며, 멀리 병풍을 둘러치고 비파를 타고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옥천서 해남읍을 넘는 고개는 소의 무릎에 해당한다고 해서 '우슬치(牛膝峙)'라 한다.

해남읍을 지나 학동서 마산면 화내리로 넘는 고개를 '아침고개'또는 '조령(朝嶺)'이라 한다.

조선 말엽 해남고을 현감들은 이곳 토족들 때문에 치정이 어려웠다.

연안이씨와 여흥민씨 두 성씨가 어찌나 세도를 부렸던지 해남 현감은 매일 아침 조령을 넘어 20리 밖에 살던 마산면 화내리 여흥민씨들을 찾아가 문안인사를 드리고 돌아와 정사를 보아야 했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아침고개'라고 부르게 됐다는 얘기가 남아 있다.

연안이씨는 이조때 상신(相臣)을 8명, 대제학을 7명, 청백리를 4명, 문과 급제자를 2백50명이나 낸 10대 명문중의 하나였다. 여흥민씨 역시 상신 12명 대제학 3명, 문과급제자 2백44명을 냈을 뿐아니라 한말 씨족세도의 전형을 이룬 민비가문인데다 마산면을 중심으로 8백50여 가구가 집단을 이루고 살았으니 그 기세와 세도를 짐작할만 하다.

이 때문에 해남현감들은 이 두 씨족 시중듣고 문안드리느라 정사를 제대로 못보았고 이들 비위에 거슬리면 곧 파직을 당했다. 이처럼 해남현감들은 국반(國班)을 자처하는 토호들 세도로 계속 파직을 당했기 때문에 현감이 되는 것을 꺼렸다. 1782년 김서구(金敍九)란 사람이 이곳 현감발령을 받았다.

그는 이 곳에 도임하자 곧 고을 뒷산인 금강산에 올라 읍지형을 살펴보았다.

금강산을 주작(朱雀)으로 보고 사방을 살피니 우슬치가 청용이고 조형이 백호요 금산과 읍 사이에 산이 하나 있는데(이 산이 호천리에 있는 葫山이다) 이는 분명 현무(玄武)라 명기(明基)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해남사람들이 거센것은 이 지형때문이라 판단하고 동헌에 돌아온 뒤 밤이면 관속들을 거느리고 매운 마늘같이 생긴 호산의 상봉을 삼척(尺) 삼촌(寸)씩 깎아내렸다.

코가 샌 소의 기를 죽이기 위해 소의 정갱이인 우슬재도 깎아내렸다.

그러나 그도 1년4개월만인 1783년 6월에 쫓겨나고 그 후임 김처승도 1년6개월만에 쫓겨났다.

읍터가 이처럼 좋다고는 하지만 서남쪽이 허해 서북풍이 세차게 읍을 때렸기 때문에 학동과 남외리에 방풍림을 조성, 오늘날도 노거수들이 숲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해방뒤 이곳 해남에는 외지에서 들어와 살면 텃세를 받지않고 상권(商權)을 쥐고 관리들도 모함을 받은 일이 적어져 사람들은 김서구 현감이 지기를 빼고 지형을 바꿨기 때문이란 여론이 일어 10여년전 노인당이 중심이 되어 호산 산봉우리를 높이는 공사를 했으나 우슬치는 도로확장사업으로 더 깎여 복구하지 못하고 있다.

서북풍을 막기위해 조성한 성내(城內)와 남외리 경계의 노거수가 있는 곳을 서림(瑞林)공원이라 한다. 이곳에 단군전(檀君殿)이 있다.

이 사우는 1958년에 지은 것으로 그전에는 화산면 금풍리에 있었다.

황해도 구월산은 93년간 이나라를 다스리던 단군왕검이 3월15일 이 산에서 죽어 승천한 곳이라해서 고려때 삼성사를 짓고 환인천제와 환웅천왕을 제사지내온 곳이다.

뿐만 아니라 이 산은 조선 말 나주출신으로, 부정자(副正字) 벼슬을 지내다가 을사보호조약을 보고 통분, 매국 5적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해 지도로 유배됐고 풀려나오자 한.일합방직전 해인 1909년 대종교를 포교하기 시작했던 나철(羅喆 1864-1916년)이 삼성사 앞에서 자결한 민족혼이 깃든 곳이다.

해남군 화산면 금풍리 출신으로 휘문의숙을 다니면 李鍾轍씨가 九月山수학여행을 갔을때 이씨는 이곳에서 한일합방후 돌보는이 없이 퇴락해가고 있는 삼성사(三聖祠)를 발견, 이 사우에 있던 단군왕검의 영정을 품에 안고 고향에 돌아와 사우를 짓고 제(祭)를 지낸 것이 시초가 된 것이다.

우슬재와 아침재는 石川 林檍과 관련 있다는 주장도 있다.

석천은 해남에서 낳아 자랐는데 한때 마산면 화내리 장천(長川=石川)에 은거해 있어서 해남현감들이 매일 아침문안 다녔다는 것이다. 우슬재는 역시 林씨 묘가 있었는데 김서구 군수가 파묘한 명당이었다는 것으로 파묘때 안개가 무릎꿇은 소형태를 했다고 한다. 조선 선조때 해남군(海南郡) 마산면(馬山面) 맹진(孟津)마을에 학식을 갖춘 이의신(李懿信)이라는 지리학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서손이라는 신분 때문에 그 문중에서 항상 학대를 받아 오던 중 생모가 돌아가셨다.

평소에 자기가 보아두었던 명당 군왕지지(君王之地)에 모시고자 시신을 바다 건너 가지마을까지 모셔다가 장례를 치르기 위하여 묘자리를 파고 있었다.

그 때 웬 병사 한 명이 나타나 우수영 우수사께서 '움먹이'(가지마을 선착장 해안지명)까지 상주더러 오란다고 했다. 이의신이 일꾼들에게 말하기를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일을 중단하라는 부탁을 하였다.

그리고 병사를 따라 움먹이 잔등을 올라가는 순간 앞서가는 병사는 갑자기 구름처럼 사라지고 바다에는 한 척의 배도 안 보였다. 이의신이 놀라는 순간 생모시신을 모신 군왕지지에서 큰 폭음과 함께 두마리의 학이 공중 높이 솟아올랐다. 그중 한마리는 바다 북쪽으로 한마리는 남쪽으로 날아갔다.

이를 본 이의신이 탄식하며[허사로다]하고 학이 날아간 곳을 바라보니 두 마리의 학이 떨어져 섬을 이뤘다.

가지 북쪽 섬을 허사도(許沙島)라 하고, 남쪽으로 누런 학이 바다에 떨어지니 이를 황도(黃島)라 불렀단다. 이의신은 묘자리로 잡은 땅이 당시의 국법으로 백성들이 묘를 쓸 수 없는 땅이라 역모죄로 몰릴까 두려워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 군왕지를 파혈을 안 했던들 명당의 덕으로 틀림없이 임금이 나왔을 것인데 파혈을 하였기에 진짜 임금이 아닌 가짜 임금이 났다고 해서 '가제(假帝)'라 불러왔다.

그 뒤 한일합방 뒤에 '가지'로 불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의신에 대한 다른 전설도 있다.

인조시대(仁祖時代)사람 이의신(李懿信=일명 義信)은 명(明)나라에서 주부(主簿) 벼슬을 했다.

그의 세보엔 짧게 <공은 지리에 정통하여 명의 주부가 되었으며 지리로서 후세의 사범이 됐다>하였다.

소년시절, 의신이 다니는 서당은 오호만을 굽어보는 만대산 불록 골짜기의 높은 자리에 있었다.

맹진리가 집인 소년은 옆에 열길 벼랑을 낀 '둠벙샘거리'를 지나서 서당엘 오고 있었다.

이목이 수려하고 머리가 좋아서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할 정도여서 인근에 그 이름이 있었다.

한가지 주위사람이 안타까워 하는 일은 소년의 처지가 정실 소생이 아닌 점이었다.

나라의 큰 재목이 될 수 있었지만 이때의 제도가 서얼을 쓰지 않는 만큼 모두 가슴 아파하는 것이었다.

어느날 이 소년이 저녁을 먹고 밤공부를 가는데 '둠벙샘거리'를 지나다가 한 소녀를 만났다.

어스름 달빛에 비치는 소녀의 모습은 어린 의신 소년의 눈에도 그지 없이 아름다워 가슴이 두근거릴만큼 요염했다. 마을에서 전엔 못 보던 얼굴이다.

의신 소년이 벼랑길에 거의 나아갔으나 소녀는 꼼짝을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길은 좁고 바로 벼랑에 닿아 있어서 소녀를 거기 두고는 비껴갈 수가 없는 터였다. 안 되겠다고 돌아서는데 등 뒤에서 방울을 굴리듯 맑고 고운 음성이 소년을 붙들었다.

"도련님 서당은 이쪽이에요!"

막상집에 돌아간다 해도 어머님의 걱정이 딱하고 이유를 말하자니 쑥스러운 참이다.

"낭자가 길을 막고 서서 서당을 가리는데 내가 어떻게 갈꼬!"

소년이 혼자말 하듯 하자 소녀가 까르르 웃었다.

가을 벌레가 조용히 우는 밤, 소녀의 웃음은 하늘의 음악같이 청아하고 애절한 기운이 있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소년에게는 남모르는 비밀이 생겼다.

저녁마다 같은 자리에서 소녀를 만났고, 그러면 으례 소녀는 소년의 입에 자기의 입을 대고 이 입술에서 저 입술로, 저 입술에서 이 입술로, 매끄럽고 향기로운 구슬을 희롱했다.

꿈결 같은 일이 계속 됐다.

자신은 모르는 일인데 남의 눈에 비치는 소년은 파리하게 야위어 갔다. 부모님은 물론 모든 사람이 그의 일을 걱정했다. 의원은 소년의 체온이 식어가고 있으나 따로 이유가 없어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본인은 더욱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하나를 들으면 백을 아는총명을 더해 갔다. 그런 어느날 서당 훈장이 소년에게 말했다.

"네가 미구에 죽을 것임을 아느냐?"

"죽기는 왜요? 전 아무렇지 않은데요. 왜들 법석인지 알 수 없어요"

도리어 의아해 하는 소년을 보며 훈장은

"의신아! 내 말을 믿거라. 너의 거동을 살폈더니, 저녁이면 너를 희롱하는 소녀가 여의주를 머금은 백년 여우가 분명했다. 천지의 이치를 우리 인간이 어찌 다 아랴마는 네 정기를 모두 넘겨가는 날이면 여우는 사람이 되고 네가 죽는 날이 될 것이다. 내일 다시 만나면 네 입안에 구슬이 왔을때 꽉 물고 달려서 내게 오너라.

그러면 내가 너를 살릴 것이다.

지금 네가 사는 길은 이 은 뿐이다."

소년이 다시 만난 소년는 왠지 초조해 하면서도 더욱 다정다감했다.

"이제 하루만 더 기다리셔요. 도련님은 곧 이 세상의 고뇌를 잊고 편안해 진답니다. 선생의 말을 믿으면 슬픈 일이 생긴답니다."

그 낭자는 은근하게 말하기까지 했다. 이 말에 소년은 정신이 들었다. 구슬이 아직도 자기 입안에 있는 것을 깨달았다.

'선생님의 말을 믿지 말라고!'

싸늘한 바람이 소년의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소녀를 떠밀어버리자 구슬을 문 소년은 죽을 힘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안 된다고 슬프게 소리치는 소녀의 음성이 소년의 모진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정신없이 서당 마당에 들어섰을 때 후다닥 문을 차고 나오면서, 훈장이 "의신아 여기다"하고 소리쳤다. 그 서슬에 힘이 풀린 소년은 디딤돌에 걸려 앞으로 넘어졌다.

꿀꺽하고 구슬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것을 느끼며 소년은 마당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채 정신을 잃었다.

늙은 여우의 슬피우는 소리가 밤하늘에 아득히 길게 메아리쳤다.

다음날 사당의 훈장은 의기소침한 몰골로 마을을 떠나면서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

"아! 아깝다. 하늘을 보지 땅은 왜 봐. 여의주가 지관 하나를 만들고 말다니, 슬픈 일이다. 그러나 세상은 명지관을 얻었다 기뻐할 것이다" 의신이 장성하자 학문과 문장이 높아 인물이 많다는 마포땅에서 그와 나란히 설 사람이 없다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아우가 선조(宣祖)때 등과해 관료에 나아가는 영광이 집안에 있었으나, 서일 출신인 의신은 갈데 없는 지관이 되어 팔 도를 주유하는 우울한 신세가 됐다.

그런 가운데 별당의 모친이 장성한 아들의 우울한 나날에 가슴을 찍다가 병을 얻자, 이내 세상을 떠났다.

그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은 '내 죄가 하늘에 닿았다.'했으니 그것은 하늘이 내린 큰 자식을 자기의 신분으로 얽매이게된 모정의 깊은 한을 함축한 한마디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어머니의 장지를 잡음에 있어 그 무렵 벌써 명지관의 이름이 놓았던 의신의 태도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오호 건너 영암땅에 어머니의 장지를 잡았는데 더러운 물이 찔금거리는 천하의 몹쓸 땅이었다.

사람들이 어찌된 일이냐고 묻자, 의신은 대답하기를 어머니로써 자식에 대한 도리를 못했으니, 이만하면 걸맞다 했다. 사람들은 그러한 의신을 가리켜 그 학문이 아까운 천하의 불효자라 했다.

그 후 삼년이 지나자 난데없이 나타난 의신은 그 모친의 이장을 서둘렀다.

이번에는 그 자리가 딱딱하여 누워있기에 고생스러운 자리를 잡아 어머니를 이장 할 것인데 그러므로써 어머니에 대한 자기의 원한을 한겹 더 풀 것이라고 했다.

이장터는 지금 목파의 입구인 허사도 앞의 돌산 '가재터'였다.

막상 이장하는 날이 되자 의신의 태도는 그의 말과는 달라서 사뭇 진지했다. 삽질 한번 곡괭이질 한번에도 조심을 보였다. 이제 곧 천관을 하여야 할 차례였다.

그때 한 초립등이 나타나 의신의 앞에 정중히 인사하고 말하기를 "지금 사또께서 여기를 지나시다가 높으신 선생님이 그 모친의 장지를 닦고 과시는데 한번 뵙고 가르침을 받았으면 한다고 정중히 여쭙고 오라 합니다."하는 것이었다.

의신은 이장꾼들에게 "이제 곧 암반이 나올 것인 즉 연장을 조심하여 쓰고 암반이 보이면 나를 기다려 천관하도록 하여라"하고 초립동을 따라 한 두발을 떼어 놓았을 때였다.

분명히 앞에서 걸어가던 초립동이 보이지 않았다. 삽시에 질린 얼굴이 된 의신이 모두 발로 뛰어 장지에 돌아오는 참이었다.

한 인부의 곡괭이가 땅에 닿는가 하는 순간 펑하며 그 자리에서 안개가 피어올랐다.

안개 속에선 한마리의 새가 날개를 치며 날아가 바다 가운데 있는 섬의 숲속으로 숨었다.

'허사로다. 하늘이 내 일을 막으니 사람의 지혜로 어찌 하늘의 이치를 당한다 할 것인가'

돌아와 묘혈을 보니 바닥의 암반이 둘로 갈라져 깊은 구멍이 나 있었다.

곡괭이질을 함부로 했던 인부가 그 일을 사죄하나 의신은 쓰게 웃을 뿐 서둘러 이장을 마치라는 말을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 후에 의신이 명나라에서 주부 벼슬에 올랐다는 소식이 이 땅에 전해지고 동시에 의신이 그 모친을 이장한 자리가 왕터였으나, 하늘이 말려 그와 같은 변괴가 있었다 하는 말이 떠돌았다.

사람들은 의신이 자기의 힘으로 이땅의 그릇된 신분제도를 고쳐볼 수 없음을 한탄해 그 후예로써 왕을 얻어 한을 풀려 했던 것인데 그 일이 허사로 돌아감으로해서 이 땅을 버리고 중원에 나아갔던 것이며, 그 일을 가슴 아프게 여긴 사람들이 의신을 기려 새가 날아가 앉았던 섬을 "허사도"라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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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왕비


 왕비  본관성씨 부  자손  춘추

태조 신의왕후 신덕왕후  안변 한씨  곡산 강씨 한경 강윤성  6남 2녀 2남 1녀  55 41

정종 정안왕후 경주 김씨  김천서 0 58

테종  원경왕후 여흥민씨  민제 4남 4녀  56

세종 소헌왕후  청송 심씨 심온 8남 2녀 52

문종  현덕왕후  안동 권씨  권부 1남 1녀  24

 단종  정순왕후  여산 송씨 송현수  0 82

 세조 정희왕후 파평 윤씨 윤번 2남 1녀 66

 덕종  소혜왕후 청주 한씨  한확 2남 1녀 68

 예종  장순왕후 안순왕후  청주 한씨 청주 한씨 한명회 한백륜  1남 1남 1녀 17  ?

 성종  공혜왕후 정현왕후  청주 한씨 파평 윤씨 한명회 윤호  0 1남 1녀  19 69

 연산군  거창 신씨 신승선  2남 33(?)

 중종 단경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  거창 신씨 파평 윤씨 파평 윤씨

신수근 윤여필 윤지임  0 1남 1녀 1남 4녀 71 25 65

 인종 인성왕후 나주 박씨 박용 0 64

 명종 인순왕후  청송 심씨 심강 1남  44

 선조 의인왕후 인목왕후  나주 박씨 연안 김씨 박응순 김제남  0 1남 1녀 46 49

 광해군 문화 유씨 유자신 3남  51

 원종  인헌왕후  능성 구씨 구사맹 3남 49

 인조 인열왕후 장열왕후 청주 한씨 양주 조씨 한준겸 조창원  4남 0  42 65

 효종  인선왕후 덕수 장씨 장유  1남 6녀 57

 현종  명성왕후 청풍 김씨 김우명  1남 3녀 42

 숙종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광주 김씨 여흥 민씨 경주 김씨  김만기  민유중  김주신  2녀 0 0  20 35 71

 경종  단의왕후 선의왕후 청송 심씨 참종 어씨 심호 어유구  0 0  33 26

 영조  정성왕후 정순왕후 달성 서씨 경주 김씨 서종제 김한구  0 0  66 61

 진종  효순왕후 풍양 조씨 조문명  0 37

 장조  경의왕후  풍산 홍씨 홍봉한 2남 2녀 81

 정조  효의왕후  청풍 김씨  김시묵 0 69

 순조  순원왕후 안동 김씨 김조순  2남 3녀 68

 문조  신정왕후  풍양 조씨  조만영 1남 83

 헌종  효현왕후 효정왕후 안동 김씨 남양 홍씨 김조근  홍재룡  0 1녀  16 73

 철종  철인왕후  안동 김씨 김문근  1남  42

 고종  명성 황후  여흥 민씨  민치록  4남 1녀  45

순종 순명왕후  여흥 민씨  민태호  0 33

 □ 인물

△ 민영환(閔泳煥)

[ 1861~1905 (철종 12~고종 42) ]

조선 말기의 문신․순국지사.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 본관은 여흥(驪興). 시호는 충정(忠正). 서울 출생. 호조판서 겸호(謙鎬)의 아들이다.

1877년(고종 14) 동몽교관에 임명되고, 이듬해 정시문과 병과로 급제, 정자, 수찬, 사인 등의 청환직을 거쳐 1882년 대사성이 되었다.

그 후 도승지, 홍문관 부제학, 이조참판, 해방총관 등 여러직을 역임하고예조판서에 올랐다.

1888년과 1890년 두 차례에 걸쳐 병조판서, 1893년 형조판서, 한성부판윤, 1894년 독판내무부사, 형조판서들의 요직을 거쳤다.

1895년 주미 전권공사에 임명되었으나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살해되어 부임되지 못했다.

다음해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귀국하여 의정부 찬정, 군부대신을 지낸후, 1897년(광무 1)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 전권대사가 되어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축하식에 참석했다.

잦은 해외 여행으로 일찍 새문물에 눈을 떠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안을 건의, 정치에 반영시켰다.

1896년(건양 1) 독립협회를 적극 후원, 민씨 일파의 미움을 사 파직되기도 했다.

후에 다시 기용되어 참정대신, 탁지부 대신, 장례원경, 표훈원 총재, 헌병사령관을 역임했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시종무관장으로 있다가 비분을 못 이겨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그가 자결시에 혈의를 장치하여 두었던 침방 뒤 골방 마루 밑에서 푸른 대나무가 났다 한다.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대신(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大臣)에 추증, 고종의 묘정에 배향,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유고에는 《해천추범(海天秋帆)》 《사구속초(使歐續草)》 등이 있다.

□ 세력

경주 대전 여주 여흥 영운 영원 영인 정선 창원 청주 해남

총 11개의 본관과 141,328명이 있다.(1985년)

 




2.무슨 파인가는 이 글만으로는 알수없고...집안 시제는 어디서 지내는지, 고향이 어느 지역인지, 또 족보를 잘 아시는 어른들께 여쭈어보심이 좋겠네요


3.


항렬배자대조표 (行列排字對照表)


대동항렬 (大同行列)

二四世

 백(百)○

二五世

○현(顯) ○혁(爀)

二六世

 치(致)○

二七世

○용(鏞) ○ 호(鎬)

二八世

영(泳)○

二九世

○식(植)

三十世

병(丙)○

三一世

○배(培) ○규(圭) ○기(基)

三二世

경(庚)○

三三世

○원(源) ○홍(泓)

三四世

동(東)○

三五世

○희(熙)

三六世

재(在)○ 형(馨)○

三七世

○석(錫)

三八世

준(準)○

三九世

○권(權)

四十世

용(容)○

四一世

○범(範)

四二世

선(善)○

四三世

○순(淳)

四四世

상(相)○

四五世

○영(榮)

四六世

원(遠)○

四七世

○종(鍾)

四八世

태(泰)○

四九世

○주(柱)

五十世

양(陽)○